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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잡종’이 늘어난다… 지구 온난화로 생태계 교란 date. 2012.08.31 view. 48,173
  • 작성자. Greene


캐나다 북서부 노스웨스트 주(州) 뱅크스 섬. 북극해 연안의 북극열도 중 가장 서쪽에 있다. 에스키모라 불리는 이누이트족이 살며, 이끼가 자라고 순록 늑대 북극여우 북극곰이 서식한다. 2006년 4월 이 섬으로 미국인 사냥꾼 짐 마르텔(당시 65세)이 곰을 잡으러 갔다. 주 정부에 4만5000달러를 내고 어렵게 북극곰 사냥 면허를 받았다고 한다.

이누이트족 가이드와 함께 멀리서 어슬렁대는 북극곰을 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가까이 가보니 쓰러진 곰의 흰 털에 군데군데 갈색 털이 섞여 있고, 발톱도 갈색이다. 작은 머리와 긴 목은 북극곰인데, 혹처럼 솟아오른 등은 북미대륙 북부에 사는 갈색 그리즐리 베어와 닮았다. 몸길이도 최대 3m가 넘는 북극곰보다 그리즐리 베어에 가까운 2.2m였다.

주 정부는 이 곰을 압수하며 마르텔에게 경고했다. 북극곰 사냥 면허로 그리즐리 베어를 잡았으니 1000달러 벌금과 최고 1년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주 뒤 DNA 검사가 끝나자 당국은 마르텔에게 아무런 처벌 없이 곰을 돌려줬다. 곰은 북극곰 엄마와 그리즐리 아빠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다. 엄밀히 보면 북극곰이 아니지만 그리즐리 베어도 아니다.

2010년 4월, 이 혼혈 곰이 잡힌 곳에서 동쪽으로 300㎞ 떨어진 노스웨스트 주 빅토리아 섬. 역시 북극권에 속하는 이곳에서 이누이트족 사냥꾼 데이비드 캅투나가 곰을 잡았다. 빈 오두막을 뒤지다 사살된 곰의 몸통은 흰 털로 덮였지만 다리와 발은 갈색이고, 북극곰보다 얼굴이 넓적했다.

DNA 검사 결과 역시 혼혈이었다. 아빠는 그리즐리 베어고, 엄마는 북극곰과 그리즐리 베어의 혼혈. 그러니까 북극곰·그리즐리 혼혈 2세다. 이로써 확인됐다. 서식환경이 달라 1만 년 이상 만날 일 없던 두 곰이 야생에서 이종교배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생식 능력이 거의 없는 노새(말과 당나귀의 혼혈)와 달리 이 혼혈 곰은 다시 새끼를 낳고 있다는 것.

생물학자들은 그리즐리 베어(grizzly bear)와 북극곰(polar bear)의 혼혈 곰에 ‘그롤라 베어(grolar bear)’란 별명을 붙였다. 왜 두 곰이 갑자기 만나서 교배까지 하게 됐는지, 북극 생태계와 관련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연구가 시작됐다. 브렌든 켈리 알래스카대학 교수 등 미국 연구진 3명은 지난주 과학학술지 네이처 기고문을 통해 이것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며, 북극권에 곰을 포함해 34개 혼혈종이 나타났거나 출현할 위기라고 분석했다.

어색한 동거

미국 뉴욕시립대 로버트 록웰 교수 등 생물학자들이 캐나다 북부 마니타보 주 와푸스크 국립공원을 탐사하던 2008년 8월. 경비행기로 공원 상공을 비행하며 여우 굴의 수를 세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깜짝 놀라 “그리즐리, 그리즐리” 소리쳤다. 갈색 그리즐리 베어가 이동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지역은 너무 추워서 북극곰만 서식한다고 알려진 곳이다.

록웰 교수 일행이 공원 관리 일지 등을 조사한 결과 이곳에 그리즐리 베어가 등장한 건 1996년부터였다. 2008년까지 9차례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듬해인 2009년 여름에도 세 차례 목격됐다.

록웰 교수는 “순록, 말코손바닥사슴, 생선 등 먹잇감이 풍부한 북쪽으로 그리즐리 베어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것 같다. 북극권 가장자리의 기후가 더 이상 그리즐리 베어에게 ‘견디지 못할 만큼 혹독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북극곰은 ‘해양 포유류’로 분류된다. 알래스카(미국), 캐나다, 그린란드(덴마크), 러시아, 노르웨이의 북극권에 서식하고, 주식이 바다표범이다. 북극해에 떠다니는 얼음(海氷)을 옮겨 다니며 먹이를 잡는데, 얼어붙은 바다를 지나 북위 88도 이상 올라가기도 한다.

30년간 북극 생태계를 연구해온 켈리 교수는 “지구온난화로 바다얼음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북극곰들이 바다로 나가기가 버거워 남쪽 육지 해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 북쪽으로 가기 어려운 북극곰과 ‘이 정도 추위쯤이야’ 하며 북쪽으로 올라오는 그리즐리 베어가 캐나다 북부 바닷가에서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롤라 베어는 이미 러시아 독일 이스라엘 등 6개국 동물원에 17마리가 있다. 북극곰과 그리즐리 베어를 같은 우리에서 지내게 했더니 태어난 놈들이다. 독일 오스나부르크대학 알렉산드라 프로이스 교수는 그롤라 베어 두 마리를 관찰한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크기는 북극곰과 그리즐리의 중간쯤 된다. 꼬리가 퇴화된 그리즐리와 달리 북극곰처럼 꼬리가 있다. 북극곰 발바닥은 얼음 위를 다니기 좋게 털로 덮여 있고 그리즐리는 털이 없는데 그롤라 발바닥은 부분적으로 털이 난다. 트럭 바퀴 같은 ‘장난감’을 주면 앞발로 내려찍는 행동을 한다. 북극곰이 바다표범 사냥할 때 얼음을 깨뜨리는 동작과 같다. 그러나 북극곰처럼 수영을 잘하진 못한다.”

동거의 의미

두 곰이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됐다는 것은 서로 경쟁자가 됐다는 뜻이다. 미국 UCLA대학 그레험 슬레이터 박사는 북극곰과 그리즐리 베어의 두개골을 3D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분석해 이 경쟁의 결과를 예측했다. 한 마디로 북극곰의 패배가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두개골 강도와 씹는 힘을 분석했는데, 깜짝 놀랐다. 북극곰이 훨씬 약하고, 이빨도 작다. 북극곰은 바다표범의 부드러운 살을 먹는 데, 그리즐리는 딱딱한 열매나 나무줄기를 먹는 데 적합한 두개골을 갖고 있다. 온난화된 북극권에서 둘이 경쟁한다면 그리즐리가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 북극곰은 아주 혹독한 환경에 너무 적응이 잘 된 몸을 갖고 있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즐리와 경쟁까지 해야 한다면 생존은 더 어려운 일이 된다.”(슬레이터 박사)

켈리 교수는 “DNA 검사로 확인된 야생 그롤라 베어는 두 마리뿐이지만, 이미 2세대가 발견됐다는 건 더 많은 그롤라가 야생에 있다는 의미”라며 “야생의 이종교배는 숫자게임”이라고 했다. 수가 적은 쪽의 유전자가 보전될 확률이 더 낮다는 얘기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수가 줄어들던 아메리카붉은늑대들이 야생에서 코요테와 이종교배를 시작했고, 지금 순수한 아메리카붉은늑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북극곰은 2만여 마리, 그리즐리 베어는 5만여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롤라 베어 외에도 북극고래와 긴수염고래의 혼혈종이 베링해에서 지난해 촬영된 사진으로 확인됐다. 그린란드 부근 해역에선 일각돌고래와 흰돌고래의 혼혈종이 목격됐다. 그동안 북극해 얼음에 가로막혀 서로 만나기 힘들었던 놈들이다. 켈리 교수는 “수천년에 걸쳐 진행돼야 할 생태계 변화가 불과 수십년 만에 일어나고 있다. 시간이 별로 없다. 북극권 생물의 이종교배 실태를 모니터하며 대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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